2월 영화 단상(리얼 페인, Fire Water, 미망, 신성한 나무의 씨앗, 아노라, 로봇 드림)

일년에 한 번씩 모으는 거 같은 단상ㅋㅋㅋ

노트랑 SNS 여기저기에 깔짝거려둔 거 살짝만 정리해서 올려둔다. 

당연하지만 모두 주관적인 관점과 감정이 매우 반영된 감상입니다.

---

리얼 페인

2/1(토) 신주쿠 토호 시네마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인류 보편적인.. 우울증이나 주변 사람을 잃는 것, 과거, 역사의 고통 같은 것들)이지만 백인 헤테로 남자가 화자가 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의 거리감이 지구를 한 백바퀴 돌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멀어지는 내 내면에 구축된 시스템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제는 이런 화자라는 것만으로도 전달력이 반 쯤 깎여나가는 걸로 느껴진다. 이제껏 너무 많이 얘기하고 들었고 스스로도 푹 절여져 있었으니 의도적으로라도 좀 거리감을 두고 싶음. 같은 이야기라도 화자가 달랐더라면(백인 여자들에게도 거리감 느끼지만 그래도 최소한 여자나 퀴어였다면) 좀 더 좋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숫자나 글자가 아닌 진짜 감각으로"라고 하고 물론 실제로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 무척 중요하지만,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어느 한 쪽이 틀리거나 경시되기만 한 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메시지도 미묘하게 느껴졌다.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가까운 이를 부러워하는 답답하고 강박적인 성격의, 그러나 매우 잘 정돈되고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설정도 식상함. 다만 좋았던 점은 폴란드 풍경을 조용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역사의 현장을 예의와 존중을 담아 그려냈다는 것 정도일까나.

 

Fire Water (에비스 영상제 2025 Docs Images and records 상영작)

2/8(토) 에비스 도쿄도사진미술관 전시실

나가타 코스케라는 감독이자 현대 예술가의 단편 다큐. 한국의 쌀 그리고 막걸리 주조 문화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어떻게 황민화 정책으로 파괴 되었는지를 읊어주는 내용인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전체적인 다큐 어조가 일본 감독들의 그것에서 기대할 수 있는 담담함, 담백함인 것도 좋았고, 우보농장의 벼 재배 농부들이 직접 황민화의 영향에 대해 읊고 그것을 일본인인 감독이 일본인의 입장, 시선에서 수평을 맞추는듯 그러나 자위나 변명이 아닌 어조로 설명해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다큐 내내 실제로 요리에도 능숙한 감독이 일본의 코우지(麹)로 막걸리를 주조하는 과정이 아름답게 담긴 것도 좋고, 무엇보다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주는 누룩이 익어가는 보글보글 하는 소리가 내내 들려서 다큐에 푹 빠져 볼 수 있었다.

3월 23일까지 계속 상영하니 한 번 더 가서 보고 싶기도? 다른 상영작들 중에도 시간 없어서 못본 거 있으니 좀 보고..

https://www.yebizo.com/program/613

 

미망

2/13(토) 신주쿠 시네마트

이런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배경이 완전히 거세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내용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본 것 같다.

우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대로 역시나 서울의 일부를 이렇게 아름답게 공들여서 담아낸 영화는 자주 없었지 싶고?(서울 출신이 아니어서 가능한 느낌으로다가..)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를 공간으로써, 광화문이나 종로 일대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게 포착하고 그려낸 영화는 내 기억에는 없었던 거 같기도. 아 물론 제 식견이 짧아서 그럴지도..

사실 이야기 자체는 진짜 별 거 없는 정말 그냥 사소하고 사적인 개인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서, 더더욱 사람보다는 그 사람들을 담아내고 그 비슷한 사연들의 사람들이 가득한 밀도로 모여있는 도시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길 가는 서울 시민들 그 중의 하나를 그냥 뚝 떼어다 잠깐 많은 소음들 속에서 귀 기울여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까? 하는 느낌.

그래서 비포 시리즈와 비슷하단 얘기도 하던데 좀 다르게 느껴졌고 인간보다는 공간의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벌써 내 고향도 아니지만 오래 머물렀던 서울을 떠나온지도 십년이 넘어서, 이제는 나한테 익숙한 종로의 모습과도 달라졌으니 좀 가짜 그리움 같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 일대에 여전히 남겨진 내 추억들과 겁쳐지는 지독한 향수나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분명 지금은 신주쿠가 나한테 더 익숙한 일상인데도 영화관을 나온 직후에는 신주쿠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웃펐다. 하핳

 

신성한 나무의 씨앗

2/22(토) 키치죠지 업링크

우선 146분이라는 그냥 숫자 쳐다보기만 해도 서터레스를 느끼게 되는 러닝타임ㅠ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졸린 부분 없이 엄청난 긴장감 속에 마지막까지 이끌어간 것, 그러면서도 큰 예산을 들인 것도 자유롭게 좋은 장비들을 쓰고 많은 스탭들이 참여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탄압을 피해 몰래 적은 규모로 찍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영화였다. 히잡 시위에서 촉발되고 제기된 문제들은 여전히 그 사회 안에서 현재 진행형이고, 실제 현실을 영화로 끌여들일 수 밖에 없는데 그 방법이 무척이나 이입 가능한 훌륭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란의 상황은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생생한 영상으로 보니 알고 있던 것보다도 더 처참했고, 바로 어떤 부분은 비슷한 그렇지만 다시끔 공권력에 의한 폭력의 비극이 벌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회피는 한 한국의 상황과 이미지가 겹쳐져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란은 위에서도 썼지만 아직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그래서 감시와 폭력을 피해 망명할 수 밖에 없던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왜 저항하는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누구나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기에 행동하고 있지만, 그 믿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현실에 눈을 뜨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건 쉽지 않다. 늘 항상, 정신차리고 공권력을 감시하고 저항하는 게 시민의 역할이다. 노력 없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은 살아가기 위해서 (거의 대체로) 누구나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 직업이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과 배치되는 것이라면.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대체로 자신을 속이며 순응하며 살아가고,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직업 선택이 누구에게나 쉬운 것은 아니다. 그 신념은 진짜인가.

---

(3월분이지만 어쨌든 주말 걸려 봤으니 여기다 모아둠..)

아노라

3/1(토) 신주쿠 토호 시네마

션 베이커 영화 보는 건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후로 오랜만인듯? 레드 로켓을 안 봐서.. 영화 굉장히 재밌었고 마이키 매디슨은 너무나 빛나는 스타이다. 나는 션 베이커 영화 중엔 탠저린을 좋아하는데 그 분위기에선 많이 멀어졌고 이번 영화는 이 감독 영화 중에 역대급으로 오락적 요소가 많아 지루할 틈새가 없다. 이 감독 영화는 오랜만에 봐도 참 영화의 색감도 그렇지만 대사도 그렇고 모든 것, 모든 요소들이 선명하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듯한 엔딩도 나에게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감독의 생각도 모든 것이 오해의 여지 없이 확실하다. 물론 이 감독의 영화가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게감이 너무 무겁지도 않고, 이야기는 적나라하고 시원시원 하면서도 작은 주제를 펼쳐내어 이야기한다.

영화 속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지만 다루고 있는 대상은 무척 현실의 땅바닥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발이 들러붙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성노동자이다. 션 베이커 영화 속 성노동자들은 딱히 평균 이상의 '선함'을 가지지도 않았고 자신의 일을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도 않는다.(물론 강제적이진 않지만 인물이 놓인 사회적 환경의 영향은 작용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상황을 벗어나 신분 상승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뚜렷하다. 현재의 상황은 한 번 문을 열고 나간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곳으로 정의 된다. 그러면서 사회가 그들을 돌보고 구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거기에 존재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이들은 옹졸하고 평범하고 미미하다. 그렇다면 션 베이커는 이들을 계속 다루어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가장 주변부들을 중심으로 끌여들여서 주변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보여주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에도 동의하지만 이 작업들이 그들의 삶에 어떤 형태로 도움이 되거나 그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노라로 팔름도르도 받았고 오스카도 받았고 이제껏 해오던 인디 스타일과 다른 타입의 영화로도 성공했고, 근데 다음에도 성노동자 이야길 한다는데 대체 무엇을 할까 싶다. 이 한우물 파기가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근데 여전히 백인 헤테로 남자 감독이라는 것이 무척 나의 심기와도 맞지 않는다..는 그래도 난 탠져린은 참 좋아했어..

 

로봇 드림

3/1(토) 신주쿠 무사시노관

예정에도 없었는데 무사시노관에서 다시 상영 중인 것을 발견하고 퍼스트데이니까! 하고 오랜만에 1일 2영화 했다.

기대했던 만큼 좋았다. 일단 주인공인 Dog는 행동거지 같은 것들이 백인 남성스럽긴 했지만 로봇은 거의 성별을 인지할 수 없는 형태로 그려진 점, 둘의 관계가 연인에 가깝긴 하지만 단순한 성애적 관계가 아니라 파트너십에 가까운, 서로를 "아낌"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린 것도 좋았다. 둘의 관계가 성애, 특히 이성애 만으로 묶일 수 없다는 걸 여러가지로 암시해둔 것이 좋았다. 무지개가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인연도 나와 타인의 만남은 타이밍과 우연과 기적, 헤어짐 역시 마찬가지이고. 모든 선택이 다른 미래로 이어지고, 미련이 있더라도 각자의 삶이 또 세월 속에서 더 공고해졌다면 보내주는 것도 당연하고. 그래서, 인간은 성애가 아니더라도 함께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가? 혼자 되는 외로움은, 혼자인 상태를 편안하게 느끼더라도, 은연 중에 어딘가에서 관계에 대한 갈구함이 배어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뭐 그런 생각들도 들었는데 그래도 뭐 어떤 형태든 새로운 만남들은 계속된다는 점에서 약간 위로 받기도 하고 그랬다.

여러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이 겹쳐 만날 수 없게 된 상대를 계속해서 다른 상황으로 다른 세계선에서 상상 속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몸으로 만나러 가는 꿈을 반복하는데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지금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육신의 제약을 상상으로 돌파하는 것도, 그렇게 부서진 몸이 새로운 연을 만나 새롭게 조립됨으로써 이전과 같지 않지만 또 다시 자유롭고 육신 뿐만 아니라 마음도 미련과 상상을 지나쳐 새로운 연과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도.. 그렇게 관계에 머무르기도 하고 또 관계의 틀어짐을 되풀이하며 종착지를 찾거나 어쩌면 종착지가 없거나 하는 그런 누구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음악들도 물론 좋았고.. 셉템버는 로봇이 부르는 휘파람 버젼이 제일 좋았다. 기억하나요? 라고 질문하는 이 노래가 이야기 속에 계속 반복되는데, 결국 기억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함께 할 때 서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닌 헤어져있을 때의 질문은 일방적 되새김질 이상의 것이 될 수 없고.. 특정한 곡에 추억과 감정을 연결해두고 불러내는 거 전형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이제 메타적으로 셉템버 들으면 이 영화 떠올리게 되겠지ㅠ